AI가 찾아준 돌봄의 인연
미국 오리건주에 사는 메릴 헤일은 57세다. 루게릭병(ALS)으로 인해 말하고 움직이는 능력을 점차 잃어갔다. 지금은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컴퓨터 화면을 조작하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그에게 기술은 단순히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통로다.
헤일의 곁에는 크리스티나 에버스라는 돌봄 종사자가 있다. 두 사람은 재가 돌봄 서비스 업체인 홈 인스테드를 통해 만났다. 업체는 이용자의 필요와 돌봄 종사자의 경험, 기술, 성격, 근무 가능 시간 등을 분석해 적합한 사람을 연결하는 데 AI와 머신러닝을 활용한다.
AI가 두 사람의 만남에 도움을 준 것이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두 사람의 관계까지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에버스는 3년 동안 헤일의 일상을 돌봐왔다. 신체적인 도움을 주는 일뿐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며 일상에서 기쁨과 어려움을 공유하는 관계를 만들어왔다.
두 사람은 음악과 스포츠를 주제로 농담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함께 웃고 울기도 한다. 헤일이 눈으로 글자를 선택해 문장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에버스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대답이 늦어도 재촉하지 않고,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일을 오래 이어갈 생각은 아니었던 에버스는 헤일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3년째 이어지고 있다.
AI는 두 사람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인연을 지속하게 한 것은 서로를 향한 관심과 시간, 그리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기다려주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기다림을 불편하게 여긴다. 질문하면 즉시 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회의에서는 결론이 빨리 나기를 바라며, 대화가 길어지면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기보다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한다.
빠른 반응은 능력으로 평가받고, 신속한 처리는 성과로 인정받는다. 기술은 이런 속도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물론 속도는 중요하다. 반복적인 일을 줄이고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찾는 기술은 사람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AI가 적합한 돌봄 종사자를 찾고 필요한 서비스를 연결하는 것도 그 가능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빨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설명하기까지 오랜 용기가 필요하다.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표현한다고 해서 그 감정의 가치가 작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반응 속도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업무가 빠르면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말이 느리면 답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빠르게 대답하는 능력과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것이다.
헤일에게 눈으로 문장을 완성하는 시간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주는 사람은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셈이다.
이것은 돌봄 현장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직원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결론부터 내리는 리더가 있다면 어떨까. 가족이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이미 답을 정해놓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누군가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데 해결책부터 제시하며 대화를 끝내버린다면 어떨까.
우리는 상대방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할 시간을 빼앗을 수 있다.
효율적인 조직은 일을 빠르게 처리한다. 그러나 신뢰받는 조직은 사람의 말을 함부로 서두르지 않는다. 구성원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이해하고,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다.
기술은 연결하고, 사람은 관계를 만든다
AI는 사람의 특성을 분석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연결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에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일, 대답이 늦더라도 기다리는 일, 힘든 순간에 곁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행동은 기술의 성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상대방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원은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이기 이전에 각자의 사정과 감정, 기대와 어려움을 지닌 사람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리더는 성과만 확인하지 않고 성과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상황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방의 말을 서둘러 끝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태도는 중요하다. 때로는 정확한 답변이나 빠른 해결책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사람이 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은 오히려 더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더 빨리 답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충분히 듣는 능력, 더 많은 일을 처리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속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기술은 사람을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연결을 의미 있는 관계로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우리는 얼마나 기다려주는 사람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자주 끝까지 듣는가? 누군가 대답을 망설일 때 그 침묵을 기다려주는가, 아니면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해 대신 말을 채워 넣는가?
리더십은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구성원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가족과 동료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효율을 추구하다가 상대방에게 필요한 시간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말을 기다려주는 일은 단순히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존엄을 존중하는 행동일 수 있다.
AI는 우리에게 더 빠른 세상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관계까지 빨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확한 답변이나 더 빠른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곁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기다려주고 있을까?